장석일 의료원장과 김대중 전대통령 장석일 성애의료원장에게는 빛나는 이력이 하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라는 직함이다. 특히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임기 동안 청와대에 상주한 주치의는 장석일 의료원장이 유일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만남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평민당 총재 시절 지방자치제 도입을 위해 단식 투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당시 보좌관이었던 최재승 전 의원이 여의도 당사에서 가까운 성애병원에 찾아와 그때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건강을 돌봐 드리게 됐다. 정치적 이념이 아닌 순전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시작됐다. 장 의료원장은 그 때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반적인 의사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살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와의 인연은 퇴임 후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장석일 의료원장은 보통 아침, 저녁으로 대통령을 문진하고, 청와대 안에 계실 때는 사무실에서 주로 대기한다. 해외, 지방 등 외부 일정에는 대부분 동행한다. 주치의 생활 중 가장 생각나는 일로 이희호 여사가 청와대 관저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골절된 일화를 소개했다. 다행히 숨 가쁜 과정을 거쳐 치료가 잘 돼 두 달 뒤 첫 미국 정상회담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 2000년 6월 평양 방문, 12월 노벨평화상 수상식, 2002년 한일월드컵 등 감격적인 순간들을 떠올렸다. 장 의료원장은 경남고와 중앙의대를 졸업하고 1987년부터 성애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수련부장을 시작으로 부원장, 병원장 등 주요보직을 거쳤다. 성애병원은 ‘친절, 절약, 인화단결’이라는 원훈 아래 지난 52년간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병원의 문턱을 낮추고 지역주민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가고 있다. ‘소리 없는 선행’으로 의료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주변 환경의 변화로 경영수지가 악화되는 부분은 앞으로의 극복과제다. 장석일 의료원장은 지역 인권위원회와 범죄피해자 지원 활동에도 관심이 많다. 초대 영등포구 인권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 지역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맡게 됐고 뜻 깊은 봉사의 시간이었다. 법에서 소외된 범죄 피해자를 위한 활동에도 앞장선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를 격리 치료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등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장 의료원장의 부모님은 6.25 이전에 이북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정착했다. 집안의 권유 등으로 어려서부터 의사의 꿈을 키웠다. 누구의 강요보다는 주변 환경과 읽었던 책들이 자신의 진로에 영향을 주었다. 소설가이자 의사였던 A.J.크로닌, 아서 코난도일이 쓴 작품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슬하에는 소설가 겸 바리스타인 아들과 회사원인 딸이 있으며, 모두 자신의 꿈을 찾아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한다고 소개했다. 성애병원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3차 대유행시 의사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장 의료원장은 지난 1년을 아무런 예측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댄 시간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 세계의 재앙이 될 줄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다. 환자를 봐야하는 병원인 입장에서 보면 조마조마한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 모두가 위기를 잘 극복해내고 있다는 평가다. 장 의료원장은 우리만의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수입이 급감하고 심지어 월급 삭감의 고통을 겪지만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지낸다. 낙담만 하면 좋아질 희망이 없으니 더 노력하는 것이라고 한다. 장 의료원장은 요즘 젊은 병원장들의 경영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병원경영 시스템도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후배 병원장들에게 특별히 조언할 건 없다고 했다. 다만 병원은 여러 복잡한 직종이 모여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며 한 직종, 한 부서만 보지 말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병원 경영자는 상황과 사안에 대해 신중해야하고, 질병 치료할 때의 메커니즘과는 달리 인식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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